*본 포스팅은 뮤지컬 <레베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레베카>는 <모차르트>, <엘리자벳>, <위키드>, <시카고> 등의 뮤지컬과 함께 국내에서 유명한 뮤지컬 중 하나입니다. 이 뮤지컬들의 특징은 바로 '번안 뮤지컬' 이라는 점인데, 해외에서 유명한 뮤지컬 작품을 '우리나라에 맞게' 번안하여 들어오는 뮤지컬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같은 멜로디의 한정된 음절에 의미는 똑같이 넣어야 하다 보니 당연히 번안 버전은 다소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가사를 비교해 보면 원 뮤지컬과 번안 뮤지컬 각자의 해석과 이미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뮤지컬 <레베카>의 넘버 "영원한 생명"과 원곡 "Sie ergibt sich nicht"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넘버는 <레베카 ACT.2>와 함께 댄버스 부인을 대표하는 넘버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극중에서는 "새 안주인 미세스 드 윈터" 다음으로 나오는데, 공연장에서 봤을 때 '영원한 생명, 죽음을 몰라' 라는 가사가 조금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느낌을 주어서 더 스토리에 밀착된 가사이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았습니다.
영원한 생명 vs Sie ergibt sich nicht
*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버전입니다.
영원한 생명 | Sie ergibt sich nicht (She Will Not Surrender) |
난초에 피는 꽃은 특별해 | Orchids are very special flowers, 난초는 아주 특별한 꽃이야 |
다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 sometimes they look as if they were dead. 때론 죽은 듯이 보이지만 |
검게 시들은 풀잎 사이로 | But at some point, completely unexpected, 갑자기, 완벽히 예상하지 못한 때에 |
다시 붉은 꽃을 피우지 | they bloom again, white and dark red. 희고 검붉은 꽃을 다시 피우지. |
그녀 난초처럼 되돌아올걸 | People say she died and they believe it,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고 믿는 모양이지만, |
난 알아 | but I know better. 내가 더 잘 알아.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죽음을 몰라 | you will not defeat her, 그들은 그녀를 이길 수 없어. |
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그 누구도 | she's strong, she won't succumb to the power of death. 그녀는 강해, 죽음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아. |
우리 곁에서 숨을 쉬어 | No, she can't be seen, 아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
난 느낄 수 있어 | but I feel she's here still alive, 하지만 난 그녀가 아직 살아서 여기 있는 걸 느껴 |
날 불러, 자신을 되살리라고 | she hears us, she sees us. 그녀는 우리를 보고, 우리 말을 듣고 있어.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
난초는 그녀의 분신이었어 | Orchids were her favorite flowers, 난초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어 |
그녈 닮은 꽃 신비로웠지 | mysterious as her and exotically beautiful, 그녀처럼 신비롭고 이국적으로 아름답지 |
때론 갑자기 시들다가도 그녀 손길에 살아났어 |
and she left even the withered and parched ones
here on the window,
그리고 그녀는 시들고 마른 것들이라도 이 창문 옆에 뒀어 |
그래, 지금 그녀처럼 죽은 듯이 | people say she died and lies in her grave, 사람들은 그녀가 죽어 무덤 속에 누워 있다고 하지만, |
있지만 | but I know better. 내가 더 잘 알아.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죽음을 몰라 | you will not defeat her, 그들은 그녀를 이길 수 없어 |
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저 바다도 | she's strong, she won't succumb to the power of death. 그녀는 강해, 죽음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아. |
어둠 속에서 언제나 서성이며 | No, she can't be seen, 아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
우릴 지켜봐 | but I feel she's here still alive, 하지만 난 그녀가 아직 살아서 여기 있는 걸 느껴 |
조용히 | she hears us, she sees us. 그녀는 우리를 보고, 우리 말을 듣고 있어. |
떠나지 못한 채 | She's complaining and speaking with me. 그녀는 내게 불평하며 말을 걸어 |
절대 길들일 수 없는 사람 | No man of this world was ever enough for her, 세계의 어떤 남자도 그녀에겐 부족했어 |
당당했었지 | she was proud and free, 그녀는 자랑스럽고 자유로웠지, |
누구보다 영리해 | she was self-confident and smart. 자신감 넘치고 똑똑했어 |
어떤 남자도 그녈 다 가질 순 없어 | No man could ever be important to her,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었어 |
자유로운 영혼 | that kind of love didn't give her anything. 그런 식의 사랑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죽음을 몰라 | you will not defeat her, 그들은 그녀를 이길 수 없어, |
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그 누구도 | she's strong, she won't succumb to the power of death. 그녀는 강해, 죽음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아. |
우리 곁에서 숨을 쉬어 | No, she can't be seen, 아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
난 느낄 수 있어 | but I feel she's here still alive, 하지만 난 그녀가 아직 살아서 여기 있는 걸 느껴 |
날 불러, 자신을 되살리라고 | she hears us, she sees us. 그녀는 우리를 보고, 우리 말을 듣고 있어.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죽음을 몰라 | You will not defeat her, 그들은 그녀를 이길 수 없어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영원한 생명 | She will not surrender. 그녀는 항복하지 않아 |
(독영 번역 출처 : https://lyricstranslate.com/en/sie-ergibt-sich-nicht-she-will-not-surrender.html , 영한 번역 : 본인) |
한국어 가사의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죽음을 모르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며 신을 추앙하듯이 부른다면, 독일어 버전의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보다 친밀하게 살아 숨쉬는 딸처럼 부르는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어 가사에서 '어둠 속에서 언제나 서성이며 우릴 지켜봐, 조용히, 떠나지 못한 채' 라고 부르는 부분이 독일어에서는
'아니, 그녀는 보이지 않지만 난 그녀가 살아 여기 있는 걸 느껴. 그녀는 우릴 보고, 듣고 있어. 내게 불평하며 말을 걸어' 라는 내용이라는 점이 이 느낌을 극대화하는데요.
한국어 버전에서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고, 떠나지 못한 채 자신을 되살리라 부른다.' 라는 구절이 특히 더 레베카를 귀신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존재를 느끼긴 하지만, 영적인 존재를 이야기하듯 말합니다. 레베카를 신격화해서 우러러보는 시선도 느껴집니다. '누구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다.' 에서 절대적인 힘을 강조하고, 죽음도 극복하는 신처럼 레베카를 그리고 있죠.
'당당했었지, 누구보다 영리해' 처럼 레베카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친근감은 느껴지지만, 가사 전반적으로 친근함보다는 엄숙하게 레베카를 추앙하는 사람으로서의 존경심이 더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레베카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되살리라고' 라는 단어 때문일까요. 그래서 댄버스 부인의 광기도 보이지만, 귀신처럼 그려지는 레베카의 존재가 더 스산한 분위기를 더하는 거 같네요.
하지만 독일어 버전에서는 댄버스 부인의 레베카를 향한 친밀함과 애정, 그리고 '새로운 드 윈터 부인'에 대한 냉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레베카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더 두드러지죠. 죽음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가사는 있지만, 이것이 레베카가 죽음을 거스르는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아끼는 주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사의 모습이 더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내게 불평하며 말을 건다.' 라는 가사가 금방이라도 살아있는 레베카가 댄버스 부인에게 말을 걸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처럼 여겨지게 하죠. 그리고 사람들이 그녀가 죽었다고 하지만 '내가 더 잘 안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 더 레베카의 죽음을 부정하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이기지 못해.' 라고 자기암시처럼 말을 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어 버전과 다르게 레베카를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것과, 새 드 윈터 부인을 비웃는 듯 냉소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즉 레베카의 힘이 절대적이어서 이 저택을 지배한다는 의미보다는, 레베카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나의 완벽한 레베카를 이길 수 없다. 라는 비뚤어진 시선이 강한 듯 합니다. 거의 레베카가 죽은 게 아니라 잠깐 잠적하고 있을 뿐 싸워 이길 것이라고 굳게 믿는 모습이네요.
개인적으로는 '난초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어, 그녀를 닮아 신비롭고 이국적으로 아름다웠지' 라고 말하는 원래 가사는 난초와 레베카를 에둘러서 동일시하고 있는데, 한국어 버전에서 직역으로 '난초는 그녀의 분신이었어, 그녀를 닮은 꽃 아름다웠지' 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준 부분이 좋았습니다. 빠르게 이해가 되고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가 난초처럼 되살아날 거라고 노래하는 게 주된 내용이라고 전달을 잘 해준 것 같습니다. 또한 '죽음의 힘 앞에 그녀는 굴복하지 않는다.' 라는 조금 어둡고 추상적인 가사를 '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저 바다도' 라며 죽음을 바다로 치환한 것도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뮤지컬을 처음 봤을 때 느껴진 '영원한 생명, 죽음을 몰라' 라는 추상적이고 큰 느낌의 메인 가사가 잘 와닿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독일 버전의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친근하게 딸처럼 여기는 애정이 한국 버전에선 덜 느껴지게 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 넘버가 '새 안주인 미세스 드 윈터' 뒤에 나온 이유는 댄버스 부인이 명확히 이 새 주인을 거부하고, '나'가 레베카를 이길 수 없다며 냉소하는 포인트를 살려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많이 축약된 것 같습니다. '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그 누구도' 라는 가사는 레베카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를 강조하지 '그 누구도' 에 나약한 새 주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얼른 연결이 되지 않네요.
독일 버전보다 한국 버전의 댄버스 부인은 사랑하는 딸을 보는 엄마와 같은 집사보다는 약간의 광신도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점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영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도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레베카를 아끼고 사랑하는 딸처럼 여긴다기보다 레베카의 자취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표정을 정말 잘 보여주죠.
'영원한 생명'의 원래 가사를 보니 어떠신가요? 한국 <레베카>공연의 경우, 댄버스 부인의 캐스팅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립니다.
죽은 연인에게 집착하는 것 같은 옥주현 배우의 댄버스 부인, 그리고 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신영숙 배우의 댄버스 부인 등의 평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저는 지금 '피아 다우스'라는 해외 배우의 연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말하듯이 연기하고 액션이나 표정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데다, 광기와 레베카를 향한 딸같은 애정이 동시에 느껴져서 연기와 노래에서 내공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뮤지컬 <레베카>를 처음 쓸 때 댄버스 부인을 피아 다우스로 가정하고 써서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댄버스 부인이 없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정도로 잘 한다는 뜻이겠죠?
이분이 부른 'Sie ergibt sich nicht' 영상입니다.
물론 각자 취향에 가장 잘 맞는 댄버스 부인과 '영원한 생명'이 있겠지요. 그리고 댄버스 부인의 레베카를 향한 감정에 대한 해석은 배우마다, 팬마다 취향이 갈리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레베카를 돌본 댄버스 부인은 딸처럼 레베카를 아낀다는 해석을 좋아하는데, 미스터리하고 음산한 <레베카>의 장르 특성상 광기 어린 댄버스 부인도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이어지는 가사가 있는 "미세드 드 윈터는 나야"를 다뤄보겠습니다. 같은 멜로디에 맞춰 다른 입장을 노래하는 뮤지컬의 싸움 장면은 가사를 맞춰보는 재미가 있는데, 독일어 가사를 맞춰보니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미세스 드 윈터는 나야" 해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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